기요사토의 역사

https://www.tomoniconomori.com/

“기요사토를 성장시킨 분들”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다카네쵸 기요사토…지금은 연간을 통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이곳은 도쿄의 물병, 오고우치 댐 개발로 인해 강제로 야츠가다케 산록 넨바가하라 개척지로 보낸 사람들이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고생을 극복하여 개척한 땅이었습니다. 현재 기요사토는 여름에는 고원에 피서를 하며 겨울은 스키로 연중 즐길 수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이는 많은 사람들이 이 기요사토를 키운 결과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 사람들중에서 지금도 그리워하고 경모하는 두분의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폴・러쉬 – Paul Rusch –

폴・러쉬 - Paul Rusch -

폴・러쉬가 걸어온 길

  • 1897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태어남
  • 1900경 켄터키 주에 이주
  • 1925 도쿄와 요코하마의 YMCA회관 재건을 위해 첫 일본 방문
  • 1926 릿쿄 대학 교수로 잔류
  • 1927 일본 성도 안드레아 동포회(BSA)를 재흥
  • 1928 퇴슬러 박사의 의뢰에 의해 세이로카 병원 건설 모금에 진력(~31)
  • 1934 미식축구 간토학생연맹 설립e
  • 1938 BSA 지도자 훈련장으로 세이센료를 건설
  • 1942 일·미 개전 때문에 미국으로 강제 송환
  • 1945 GHQ장교로 다시 일본에 옴
  • 1946 기요사토 농촌센터 (KEEP) 구상
  • 1948 기요사토 세이안드레교회 완성
  • 1949 고랭지 실험농장 시작
  • 1950 기요사토 세이루카병원 개설
  • 1957 세이센료 재건 기요사토 세이요하네보육원 개설
  • 1963 기요사토 농업학교 개설
  • 1979 12월 12일 세이루카국제병원에서 서거

기프(KEEP)로 가는 길

기프(KEEP)로 가는 길

폴・러쉬는 미국 인디애나주 페어마운트에서 태어났으며 켄터키주에서 자랐습니다. 1925년 간토 대지진으로 와해된 도쿄와 요코하마의 YMCA회관 재건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한해 동안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 준비했던 러시를 “일본에 남아, 릿쿄대학에서 가르치지 않겠나”라고 설득한 것은 당시 릿쿄학원 이사장이었던 머킴 주교였습니다. 미국으로 귀국 의사를 바꾸지 않기에 주교는 열심히 설득하다가 급기야”1년만 이라면”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냅니다. 이 때의 러쉬의 선택이 자신의 이후의 인생을 크게 바꾸게 됩니다. 교육자로서의 생활 속에서 러쉬가 믿음을 보여주는 제자들의 열성에 감동 받아 그들의 버팀목이 되여야 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신앙을 통해서 희망을 주고 싶었던 러쉬는 학생을 위한 조직을 만들고 있는 가운데”기도와 봉사”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미국의 BSA(성도 안드레아 형제회)을 만나서 깊은 감명을 받고 1927년 미국 BSA의 일본 지부를 발족시켰습니다.
이때 러쉬는 30살이었습니다.
이듬해, 퇴슬러 박사의 부탁을 받고 관동 대지진으로 파괴된 채로 남아 있던 세이루카국제병원을 재건하기 위하여, 러쉬는 박사와 함께 미국에 돌아거서 모금 활동을 실시합니다. 이때 박사로부터 인맥, 모금의 테크닉 등의 많은 것을 이어 받았습니다. 재건을 위한 모금 활동이 성공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러쉬는 자신의 학생들 때문에 새로운 사업에 착수합니다. 그것이 BSA의 본부 회관과 지도자 훈련 캠프장 건설입니다. 1938년 많은 사람들의 지원을 얻어 대망의 지도자 훈련 캠프장이 완성됩니다. 그곳은 후지산을 바라다보는 아름다운 야츠가타케 산록으로, 기요사토 마을과 오이즈미 마을에 걸친 것으로, 마을 이름의 한 글자씩을 맞추었다”세이센료”라고 이름 지었습니다.”Pure Spring”이라는 의미도 매우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기프(KEEP)로 가는 길

그 무렵 세상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발전하며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일본을 떠난 후에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러쉬도 마침내 진주만 공격 하루 만에 구속 수감되고 이듬해 42년에 강제 송환되었습니다. 귀국 후에도 일본의 일을 우려하고, 육군일본어학교의 교사가 되는 것을 지원합니다.그리고 희망대로 배속된 그는 그곳에서 일본인을 돕는 데 주력했습니다. 종전 직후인 1945년 9월에는 GHQ장교로 괴멸 상태의 도쿄로 돌아온 러쉬는 민주주의에 기인한 일본의 부흥을 위해서는 국토의 70프로를 차지하는 중산간부의 개척과 농촌의 부흥이 선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 GHQ을 퇴역했으며 세이센료에 돌아온 러쉬는 새로운 사업에 힘썼습니다. 세이센료를 거점으로 한 모델 농촌 공동체 구상 사업입니다. 식량을 얻고 교육과 의료를 받을 기회와 장소의 제공, 신앙의 거점을 만드는 것 등을 계획합니다.이렇게”기요사토 교육 실험 계획(KEEP)”이 태어났습니다.
KEEP의 사업은 결코 평탄한 길을 걷은 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야츠가타케의 화산 폭발로 생겨난 바위와 돌이 무수히 박혀 토지 개간, 물의 안정 공급, 겨울의 혹한에 견디는 것 등 쉽지 않은 현실을 넘지 않으면 안 되였습니다.기요사토를 위하여 모든 정력을 기울인 러쉬가 종종 어려움을 겪었을 때 그를 지지한 것은 자신의 기독교 신앙과 그의 활동을 이해하고 응원하는 주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어려운 사업에 대해서, 러쉬는 항상”나는 방법을 가르쳤을 뿐, 실제로 한 것은 일본사람들, 기요사토의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일본인들 때문에, 러쉬는 종종 미국으로 건너가 후원회 투어를 하고 많은 기부금을 모았습니다. 이러한 강연을 들은 사람 중에 개척에는 트랙터가 필요하다고 마력에 정평 디어앤드컴퍼니의 존디아 트랙터를 기부해주신 미국의 독지가도 있었습니다. 1951년에 기요사토에 온 녹색의 몸통에 노란 휠이 뚜렷한 존디아 트랙터 모델 B가 그것입니다. 이 기부가 계기로 디어앤드컴퍼니의 휴위트 사장 부부와의 직접 인연이 태어나며 추가 휴이트 사장 부부한테서 트랙터의 제공을 받을 기회가 온 적이 있었습니다. 또 같은 시기에 조식과 혹한에 견딜 수 있다는 것으로 저지젖소의 황소가 한마리 기부되었습니다. 이 한마리가 무사히 겨울을 넘기면 이듬해에 암소가 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멋지게 봄을 맞은 황소는 이듬해 암소 7마리와 송아지 1마리와 함께 KEEP의 낙농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이것이 현재 KEEP 농장에서 볼 수 있는 존디아 트랙터와 저지소의 연유입니다.
이렇게 해서 온갖 어려움을 딛고 KEEP는 야트가타케 지역개발의 주축이 됐을 뿐만 아니라 전쟁후 일본의 농촌 부흥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해라 게다가 일류가 되여야 한다

최선을 다해라 게다가 일류가 되여야 한다

1955년 재단 법인 기프(KEEP)협회가 스타트를 끊으려던 참에 세이센료가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이 절망적 상황에 상심하는 러시를 격려한 것은 지역 사람들과 아이들이며 미국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차례로 커질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지만, 주미 후원회 및 록펠러 등 각계의 유력자가 러시의 사업을 지원하고 자금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무상 원조도 많았습니다.기독교의 이웃 사랑과 함께 러시의 유례가 드문 열의와 매력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러쉬는 상냥하고 인정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웃는 얼굴이 인상적이었고, 성급한 곳도 있지만 외로움을 잘 타고, 눈물 많은 사람이었다고 그를 직접 아는 사람들은 말합니다.그는 틀림없이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보통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Do your best, and it must be first class.” (최선을 다해라 게다가 일류가 되여야 한다)이는 러쉬의 인생의 스승인 세이루카국제병원 설립자·퇴슬러(Teusler) 박사에게서 전수 받은 말을 러쉬가 짧게 만들어 주제로 한 것입니다. 퇴슬러 박사는 러쉬에게 “만약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뭔가 하려면 진짜를 보여줘라. 게다가 그것은 일류가 되어야 한다. 절대로 이류의 짓은 하지 마라”라고 가르쳤습니다.러쉬는 평생 이 가르침을 충실히 지켜 왔습니다, 기요사토의 개척, 그리고 젊은이에게 희망을 주는 것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1979년 폴・러쉬가 세이루카국제병원의 침대에서 영원한 잠든 것은 82세의 12월의 일이었습니다.


安池 興男 – 야스이케 오키오 –

安池 興男 - 야스이케 오키오 -

1938(쇼와 31)년, 오쿠타마 호수의 건설에 따라 고향이 가라앉게 된 다바야마 마을, 고스게 마을의 사람들이 기요사토의 땅에 이주해 개척이 시작되었습니다.야스이케는 당시 농림부로부터 현에 파견되어 온 기관으로 농업 지도를 비롯한 개척민을 지도하였습니다.
“야마나시의홋카이도”라고도 불릴 정도로 추운 기요 사토에서 작물을 만들기 위해 힘든 고생을 겪었지만 야스이케는 자신의 생활을 무릅쓰고 지원을 계속했습니다.개척민의 비료 제공 및 분교장 건설 협력 등을 비롯한 야스이케의 노력은 개척민과의 인연과 함께 지금도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기요사토 이야기”

(고노요코 문 이 글을 토대로 기요사토에서는 그림책의 간행이 기획됐으며 마을 사람들, 기요사토를 찾는 사람들에게 고난의 그러나 믿음과 희망에 찬 이야기를 전달하려 하고 있습니다.)

기요사토는 해발1200미터의 고원입니다.
물은 차고 하늘은 넓고 훨씬 후지 산이 떠오르고 보입니다.가을과 겨울이 길어 최저 기온은 영하 이십도까지 내려가는 것이 있습니다.
이 야츠가다케 산록의 고원이 기요사토라고 불리게 된 것은 아마 메이지 8년부터입니다. 이 해에 2월 15일 당시 아사카와 마을과 카시야마 마을이 합병하고 기요사토 마을이 되었습니다.아무런 장점도 없고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여름 기요사토는 젊은이의 거리가 됩니다. 역 앞길도 세이센료도, 민박도 펜션도 다방도 기념품 가게도, 사람, 사람 사람으로 넘칩니다.붉은 바지의 사이클링의 일당이 목장 사이를 달리며, 연인들이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요사토는 바뀌 었습니다. 
우리가 개척자로서 이 기요사토로 찾아왔을 때 여기는 온통 황야였다.우리의 고향은 도쿄의 물병으로불리는오고우치 댐(오쿠타마 호수)의 물밑입니다. 이 댐을 만들기 위해서, 오고우치, 다바야마, 고스게의 세 마을에서 945세대가 근처에 가야 했어요.산골의 작은 마을에서 숯을 굽거나 잡곡을 만들어 먹고 살던 우리는 “대동경시의 백년 대계”라는 악마에게 혼이 나가고, 반대 소리 하나 내지도 못했습니다.

감격의 충정 낙토를 개척

게다가 도쿄시의 태도가 오락가락하고 보상금을 받고 마을을 나서기까지 여섯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마을 사람들은 삶의 방향을 잃고 논밭이 트고 빚이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우리 다바야마촌의 28채는 신천지를 찾아 야츠가타케 산록 넨바가하라 개척지로 이주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것도 알면서도 각 호에서 한명씩 선발대를 뽑아서 가족들을 남겨두고 마을을 나섰습니다. 쇼와13년4월17일.
도중 고후역에서 하얀 조용한 청년을 맞이했습니다.야마나시현 경지과 관리로 야츠가타케 개간사무소 야스이케 오키오였습니다. 기요사토역에 내려섰을 때, 고원은 멋지게 맑았었습니다.아직 어린 나는 무심결에 ” 푸른 하늘은 우리 집이다”라고 마음에 외쳤습니다.
우선 당장의 농기구로 괭이 한자루씩 전달되었습니다. 그 날부터 개간 사무소 사무실과 창고를 빌리는데 숙소다며 마루방 위에서 고로침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국가와 현에서 집을 짓는 보조금이 내려오는 데 얼마의 참을성의 것이었습니다. 이전을 위한 보조금은 쌓이고 쌓인 빚을 갚으면 없어졌습니다.여기로 힘 이외에 살 길이 없습니다.

감격의 충정 낙토를 개척

기요사토는 탁 트인 곳입니다.
산 비탈의 밭을 세세히 갈았던 우리가 뭐 어떻게만입니다. 처음 일주일은 야스이케 소장에 끌려서 옆집의 나가노 현 미나미마키무라의 고원 농업을 둘러보고 걸었습니다.노베야마지구에 양배추나 배추, 판교 지구의 벼 재배 등 우리의 넨바가하라보다 더 고도가 높은 곳에서 힘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비료의 지식도 제대로 없는 저희 때문에 야스이케소장은 질소, 인산, 칼륨의 삼요소의 시험 밭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오 단보씩의 땅이 배정되었습니다. 장소를 결정하는 것은 추첨입니다. 공평을 기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개정했습니다.산성 땅을 중화시키기 때문에 석회가 뿌려지고 감자, 고구마, 콩, 팥, 옥수수, 밭벼 등의 씨앗이나 모종이 배포됐습니다.
힘 내지 않으면!
석 달 남짓이 지났습니다.약속의 집은 아직 설 기색조차 없습니다. 모두 공동 생활에 지쳤습니다.우리는 각자의 집을 지겠다고 안 지 소장에 신청한 것입니다. 타바야마 시절의 스미야키 집 만들기의 지혜가 살려짔습니다. 통나무를 엮다, 삼피을 치고 입구에 멍석을 흘립니다. 넓은 것이라도 팔장 사이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줄줄이 가족이 부르는 받았습니다. 가재 도구와 함께 묘비까지 메고 온 일가도 있었습니다.아이들은 여섯㎞ 떨어진 키 요사토 초등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고원에서의 첫 수확은 무우입니다.푸른 우거진 잎을 잡고 한개 한개 뽑아 갔을 때의 감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야스이케 소장 지도하에 농사 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첫 출하는 오사카의 시장에 양배추를 두 화차.대호평으로 알고, 친미 조합원은 손을 붙잡고 기뻐했어요. 현금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야스이케소장의 권유로 채소 행상을 하게 되었습니다.화차로 무우와 감자를 고후로 운구, 소장의 관사에 머물러서 교대로 시내를 행상했습니다. 

“부인, 우리들 더러운 것이 토방구석 괜찮아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감격의 충정 낙토를 개척

오두막 집에서는 불과 몸을 녹이기 위해서, 끊임 없이 소나무 뿌리가 남아 있습니다. 옷에도 몸에도 송야니이 배고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부인은 그런 우리를 정중히 손님으로서 대접하다 주셨다.함께 관사를 돌아 채소 절임용 무 주문까지 받아 준 것입니다. 11월에 들어가정지도 없이 야츠가다케 주봉 적악에 눈이 내렸습니다. 눈은 두번 세번 점차 아래로 내려와서 네번째에는 친정으로 갑니다.키 요사토 고원의 길고 괴로운 겨울이 시작될 것입니다. 드디어 이 겨울은 굴립 오두막에서 지내야 합니다. 야스 이케 소장이 가슴을 앓고 있는 모습이 잘 알았습니다.고후의 관사에 돌아오면 마루 밑의 귀뚜라미의 우는 소리에 고원의 추위를 생각에 한숨도 안 자는 밤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 눈으로 걱정은 아이들의 통학입니다. 육킬로 길은 고개도 있고 계곡도 있습니다. 대롱으로 통하는 길, 미끄러지기 쉽고 위험합니다. 어느 정도의 눈이라면 아이들은 걸을 수 있을까요?지금까지도, 저학년 자녀를 걱정하고 어른들이 교대로 츠키소쯔어 가고 있었어요. 하지만 개척지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린 시간이 아까워서 안 됩니다. 근처에 학교가 있으면 절실하게 생각합니다. 팔순이 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난처하게 매장할 장소가 없습니다. 개척지 사람들이 벌써 몇명도 죽고, 마을의 공동 묘지가 가득 되어 버렸습니다.소장은 경찰과의 협의로 난리입니다. 지금까지 죽은 사람 대부분이 노인과 아이였습니다. 환경이 나쁘군요. 겨울에는 집안에도 해로운 열 두세번까지 내려갈 것입니다.사발지도 마시다 남은 것의 차도 꽁꽁 얼어붙습니다. 

“어쨌든 집을 짓지 않으면” 
소장의 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감격의 충정 낙토를 개척

건평 25평 콘크리트 기초, 흰 벽 칠 기와 농가 구조. 건축비 1000엔 내와케은 국고 보조 300엔, 현 100엔, 도쿄시 600엔이었습니다. 중일 전쟁의 영향으로 물가가 오르고 1000엔은 무리라는 것을 우리가 허드렛일을 돕게 하여 겨우 완성했을 때, 개척지는 두번째 겨울에 들어 있었습니다.쇼와 14년의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못 가게 되어 버렸습니다.나이 든 아이의 “소렛”소리를 신호로, 산길에 가방을 내던지면서 하루 종일 놀아, 시치미떼는 얼굴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에게 “이주민의 아이가 왔다”라고 괴롭힐 수 있어”
하지만 정말 괴로운 것은 “냄새나, 냄새나 “와 마구 놀려대는 거였어요.
송야니의 냄새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싫어하든, 집안에서 소나무 뿌리를 태우지 않으면 깜깜한 가운데 추위에 떨고 있어야 하고는 없나요?아이를 꾸짖는 부모의 가슴에 학교가 달라는 소원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두 학급 백평의 분 그소를 짓는 데 만 2천엔이나 걸립니다. 안 지 소장이 뛰면 오고치 저수지 건설 사무소의 협조로, 도쿄시가 8천엔 내고 주게 되었습니다.하지만 국고 보조 3천엔의 신청은 “그런 작은 개척지에 분 교과부는 사치”과 깨끗이 반려되어 버렸습니다.
바로 그때, 8250엔으로 교사의 건축을 받겠다는 업체가 나타났습니다.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우리는 부족분은 근로 봉사로 메우기로 해서 내년 봄 4월의 개교를 목표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업체는 물가 급등을 이유로 치비치비와 돈을 달래면서 계약 금액을 넘자마자 행방을 감추어 버렸습니다.하청의 목수도 임금 체불을 이유로 나타난다고 하지 않습니다. 드디어 상량을 막 끝낸 교사는 비바람에 노출될 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불안과 불만을 품은 다섯채가 집단 협력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집과 밭은 고스란히 행동은 향후 일체 자유, 농사 조합도 걸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뭐라고 멋대로..걱정해 안지 소장에 “동반 하락은 싫어. 너는 그만 따라갈 수 없다.”와 사테제리후을 던지며 동료로부터 떨어진 것입니다.이십 팔채 중 보상금의 나머지를 잠시라도 쥐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군. 나는 오늘 상사로부터 히로시마현으로 영전의 내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퇴했다. 내가 없어지면 너희들은 어떻게 되나. 오늘까지의 고투의 길을 알고 있는 것은 나 뿐이다. 과장은 화가 났어. 앞으로 저의 장래에 대한 책임은 일절 지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나의 방식을 지나치다며 독촉만으로 무엇 하나 협력하여 준 적도 없다. 부장은 나한테 넥타이를 내던지면서 강아지처럼 쫓아내기도 했다. 개간소장이 이주자의 신상을 걱정하고 상담에 가서 뭐가 나쁘다는 거야?나는 관리를 그만두겠다. 너희들과 함께 이 사업을 마무리 할때까지 이곳을 움직이지 않겠다.여하튼 나를 믿고 따라와 달라”

평소에는 조용한 야스이케 소장의 불을 뿜는 듯한 호소했다.이주 이후 우리의 가슴 속에 있던 “언젠가 어딘가로 가는 사람”이라는 불안은 사라지고 이 소장의 있는 사이 자신들의 신변 처리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시즈오카에 있는 아버지에게서 돈을 빌리기로 했다.그래서 단숨에 학교를 완성시키지 않을까”동료의 대표 두 사람을 데리고 소장은 시즈오카로 떠났습니다. 그 집을 알고 목수가 올라탄 것입니다.건축 현장에서 자재와 공구류를 끄집어 내는 그 다섯명이 가담했습니다. 급보를 전하고 달려간 우리. 황혼의 기요사토 역에서 인차라도 유혈 사태가 벌어질 직전이었습니다. 큰 자재는 토리압사엤지만 이불에 싸연 못, 철사, 볼트 세트 모두 반출된 것입니다.전시 색 짙은 현물 입수의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야스이케소장에게 알려야”
이튿날 아침 첫열차 기다릴 수 없습니다. 밤 열시 내에서 젊은이 두 사람은 등불 사십 킬로미터의 산길을 봤더니입니다. 새벽 니라사키까지 와서 역시 지친 우리는 역 앞 돌 위에 잠깐 졸다, 고후의 관사에 도착한 것은 아침 여덟시아무것도 모르는 소장들은 김의 성공을 기뻐하다 마주치면서 아침 식사 중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장은 이변을 감지한 것 같았어요. “왜 이토록 고생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가.도쿄 시민들에게 희생된 너희들이라는데.”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우리의 손을 쥔 소장의 뺨에도 눈물이 흘렀어요.

감격의 충정 낙토를 개척

노인이 허리를 굽혀서 차를 실어 옵니다.
어린 아이가 눈앞의 방해되는 자갈을 줍고 있습니다. 지붕 위와 아래로 목소리를 흥정하는고 있습니다. 야스이케 소장이 복도의 판자를 부딪치고 있습니다. 동료에게 목수의 기술을 가진 청년이 있는 것은 행복했어요.”일치 협력, 주야 겸행”라고 하지만 전문가 앞으로 반년은 걸린다고 한 공사를 우리는 무려 이십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23호의 전원이 불에 탔다 20일 간이었어요. 기요사토 고원의 방풍림에 둘러싸인 일각에 분교장을지었습니다. 교실은 단 두방뿐이지만, 직원실도 있습니다.숙직실도 있습니다. 고원의 아침 안개 속을 야스이케소장이 방울을 흔들면서 걷고 있습니다.공사의 준공을 축하하여 모임을 열려고 집집마다 소식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 향기도 새로운 분교장에 음식을 각자 가지고, 잔치는 시작되었습니다.
술이 돌 정도로 그동안의 고생의 하나하나가 가슴에 파고들어, 기쁜지 억울한지 모르는 눈물이 넘칩니다.가슴의 응어리를 어딘가에 부딪치고 싶고 이유도 알기 전에 시비가 붙어 누군가가 코피가 터졌습니다. “그만둬! 너희들은 또한 교사를 피로 더럽힐 것인가」날카로운 소장의 목소리였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를 지탱하고 온 것은 무엇인가. 다만 서로의 신뢰감만이 아닌가. 너희들은 돈이 없어서 진지했다. 가난이라 뭉쳤다.부 반드시 재 아니라, 탈락한 다섯명에 오늘의 기쁨은 없다”
쇼와 15년7월25일.기다리던 개교식 날이 다가왔습니다

감격의 충정 낙토를 개척

인사에 선 야스이케소장은 단상에서 감동한 나머지 목소리도 안 나옵니다. 어른도 아이도 고개를 낮게 끼어 오열로 목이 메어서 있었습니다. 식 후 아이들의 연극이 벌어졌습니다. 이 날을 위해서 한달 동안 열심히 연습했거든요.우리는 오랜만에 실컷 웃고 갈채를 했습니다. 쇼와16년6월 야스이케소장은 나라현 경지과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이 삼년동안 소장은 관리로서의 입장과 우리 생각 사이에 끼여 견뎌왔습니다. 소장을 백안시했던 상사들도 전쟁중에 위급을 알리고 식량 증산이 중요한 국책이 되면서, 야츠가타케 개간 사업을 이룬 소장을 고쳐 봤을까요? 분교장 건설의 부채를 상환하고 있는 중입니다. 농사 조합에 의한 자작농 창설 사업도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젠 스스로 해야 합니다.전도 유망한 청년을 언제까지나 붙잡는 수는 없습니다. 기요사토역에서 우리는 울었습니다.
아버지처럼 형처럼 따르던 소장님, 야스이케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안녕 안녕

감격의 충정 낙토를 개척

소장이 떠나고 반년후,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개척지에서도 몇명의 남자가 출정했다가 몇명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고치 댐의 공사도 중단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쇼와 19년 10월 부채를 완젰고 이어 자작농 창설을 완료.우리는 오랜만에 야스이케 소장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덕분에 맑고 주인이 되었습니다.꿈만 같습니다”라고…. 소장이 없어져 꽤 지나고 나서 우리는 처음있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주후 1년, 비료와 종묘류는 전부 현에서 지급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소장의 자기 부담했다는 것입니다.소장은 월급의 일년분의 대부분을 우리에게 털어 준 것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영농 자금도 인정하지 못한 현이 우리에게 준 것은 결국 괭이 한자루밖에 없습니다 종전 후 나라는 식량난 타개를 위한 개척 정책에 힘을 싣고 키 요사토에도 속속 새롭게 이주자가 들여보내어 왔습니다. 그 제일진이 현재 아사 히가 오카 지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팔년 선배인 우리 삶의 가난에 이 사람들은 눈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라에서 힘을 해도 각종 명목의 자금은 결국 정착민의 어깨에 빚이 되고 짓누를 것 뿐입니다.아사 히가 오카에 이어동 공장 아래 만약장과 이주자는 늘어 갔지만 역시 고생이 끊이지 않더군요. 릿쿄대학의 폴 랏슈 박사가 전쟁 전부터 대학의 시설을 확충하고 키 요사토 농촌 센터를 개설된 것도 요즘의 일입니다.훌륭한 교회와 실험 농장, 병원, 도서관 등이 만들어지고 근교의 농가와의 교류도 자주 했습니다.

것으로 매년 팔월에 열린 캉티 페어는 우리 농가에게 최대의 축제였습니다. 소와 목초지의 공진회에서 우리는 성적을 서로 경쟁하는습니다. 농업 기술과 목축의 연구회도 있었습니다.초등 학교 어린이들에게 우유를 지급하고 준 시기도 있고 그 답례로 농장 주위의 풀베기에 가기도 했습니다. 결국, 도시의 젊은이들이 여기저기 기요사토를 찾게 되고 센터 숙박시설, 세이센료는 인기 가게가 되었습니다.
기요사토는 점차 관광지화하였습니다. 우리의 동료가 민박집으로 전향하기 시작한 것은 쇼와 44년 무렵부터입니다.저도 지금은 목장과 민박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기요사토마을은 근처의 4개 마을과 합병하고 다카네쵸로 되었습니다.쇼와 46년, 고원의 목초지의 일각에, 우리의 공동 묘지가 완성했습니다. 즐비하게 선 23개의묘비는 멀리 고향인 다바야마마을을 마주보고 섭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도록 뒤쪽에 야스이케선생님의 무덤도 있습니다.생전의 무덤입니다. 

감격의 충정 낙토를 개척

그 뒤에 선생님은 “감격의 충정 낙토를 개척 흥남”라고 새겨졌습니다. 동고동락했던 동료는 벌써 상당수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언젠가는 전원이 이 검은 색 미카게의 돌 아래 고원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잠드는 것입니다.
오고치 댐 공사가 재개한 것은 쇼와 23년 준공은 32년이었습니다.그리고 오쿠타마 호수라고 이름이 개정되어 도쿄도의 휴식의 장소로 사랑 받고 있다고 합니다.

초록으로 둘러싸이고, 호수의 물은 기요사토의 하늘처럼 오늘도 파랗고 맑을까요?

감격의 충정 낙토를 개척

*본문은 “감격의 충정 낙토를 개척”에서 전재했습니다.

1 2 3

4